혁명 봉기의 계속과 실패
동맹회 활동중국동맹회는 같은 처지로 일본에 망명하고 있던 세력인 캉유웨이의 입헌파와 사상적인 논쟁을 전개하면서도 혁명운동의 구심체로서 조직적이고 계통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동맹회의 활동은 입헌파에 비해 훨씬 어려움을 겪었다. 왜냐하면 혁명 활동이란 비밀활동을 필요로 하는 것이며, 또한 중국 국내에는 동맹회 세력의 본부를 설치할 곳이 없었다.한편, 동맹회의 혁명이란 무력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므로 무력 또한 물질적인 자금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이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혁명당은 각지의 회당과 군대에게 연락하여 이들과 함께 혁명운동을 전개하였다.[19] 쑨원의 전략은 해외에서 혁명 이론으로 무장한 혁명 세력을 본토에 침투시켜 전국 규모의 봉기를 유도한다는 것이었다.[20] 그는 삼민주의를 내세워 군법,약법,헌법의 순서로 혁명을 전개한다는 3단계 혁명방안을 구상했다. 쑨원의 동맹회는 선전활동 외에 반청 무장봉기를 1905년~1911년 우창봉기 이전까지 수십여차례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19] 그 가운데 1908년 10월에 일으킨 ‘안휘성 신군 봉기’와 1910년 2월에 일으킨 ‘경술 신군 봉기’, 그리고 1911년 4월에 일으킨 황화강 봉기등이 대표적인 사건인데, 이러한 무장봉기 실패들은 동맹회에 커다란 타격을 받기도 했다.동맹회를 중심으로 한 무장봉기는 계속 실패해왔으나 국내에서의 혁명적 정세는 계속 확산되어가고 혁명적 분위기를 고조시켰다.주요사건안휘 신군 봉기1908년 10월 안휘 성에서 ‘신군 사건’(新軍事件)이 발생했는데, 이를 ‘안휘 신군 봉기’라고 부른다.[22] 신군은 위안스카이가 새로 편성한 신식 육군으로 신군의 청년 장병 가운데에는 쑨원의 혁명 사상에 동조하는 민족주의자들이 많았다. 이들은 악왕회라는 비밀단체를 만들어 한족 국가 건설의 결의를 다졌다. 1908년 10월 23일 악왕회의 간부인 범전갑은 광서제와 서태후의 죽음 소식을 듣고 10월 26일을 기하여 봉기하기로 하고 각 진영의 간부와 연락하여 웅성기를 사령관으로 추대하였다.[22] 이렇게 해서 성 밖에 있던 신군은 일제히 봉기하였으나 탄약의 부족과 성 안의 군대가 내응하지 않고 해군 또한 봉기에 반대했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주동자였던 범전갑은 체포, 처형되고 웅성기는 일본으로 건너가 그 곳에서 중국동맹회에 가입하였다. 그 후 웅성기는 다시 청나라에 잠입하여 유럽에서 귀국하는 섭정왕의 두 동생 재도(載濤)와 재순(載洵)을 하얼빈 역에서 암살하려다 밀고로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졌다.경술 신군 봉기1910년 2월, 광둥 성의 신군이 구정을 기해 일제히 봉기할 계획을 세웠다. 지금까지 신군 봉기는 주로 혁명파가 신군의 간부를 설득하여 봉기를 일으키도록 유도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번 광둥의 경우는 혁명파의 청년들이 신군 가운데 잠입하여 봉기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혈기 왕성한 혁명파 청년들의 적극적인 행동은 노련한 감시자의 눈에 띄기가 쉬웠다.[22] 봉기 계획을 알아차린 신군의 수뇌들은 무기고에 있던 탄약을 모두 감추어 버렸다. 이 같은 사실을 전혀 몰랐던 신군의 보병 200여명이 무기고로 달려갔으나 탄약은 하나도 없었다. 봉기는 결국 실패했다. 이번 봉기에는 왕조명이나 호한민이 홍콩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가담할 예정이었으나 탄약을 구하지 못해 신군이 해산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 사건을 ‘경술 신군 봉기’라고 부른다. 봉기의 주동자 예영전은 전사하고 신군 34표(標, 1표는 200명 단위)의 책임자 조성(趙聲)은 어렵게 탈출하였다.왕조명의 순친왕 암살 기도혁명 봉기가 실패를 거듭하자 입헌파의 기관지 《신민총보》[주해 15] 와 동맹회의 기관지 《민보》까지도 ‘혁명파의 수령들은 편안히 앉아 있기만 하고 애매한 대중만 죽음에 몰아넣었다’고 비난을 퍼부었다.동맹회 기관지 《민보》의 격렬한 비난에 분통을 터뜨린 왕조명은 《민보》의 보도가 잘못이라는 실증을 보여주기 위하여 베이징으로 달려갔다. 혁명 투사들뿐 아니라 자신도 혁명을 위하여는 목숨을 바치겠다는 결의를 보이기 위해서였다. 베이징에 올라온 왕조명은 웅성기가 하얼빈에서 암살하려다 실패한 바 있는 두 황족을 베이징 도착 때 폭살할 계획을 세웠다.[22] 그러나 두 황족이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는 많은 출영 인파로 그들을 분별할 길이 없어 예정을 변경하였다. 왕조명은 섭정왕인 순친왕을 폭살할 계획으로 순친왕이 자주 통과하는 다리 밑에 폭탄을 장치하였으나 이것마저 사전에 통행인에게 발각되어 미수에 그쳤다. 수색 끝에 폭탄 표피를 만든 대장간이 적발됨으로써 왕조명도 체포되어 무기형에 처해졌다. 왕조명의 순친왕 암살 기도 사건은 1910년 4월의 일이었다황화강 사건 문서도 참고하십시오.1910년 10월 쑨원과 황싱, 조성(趙聲) 등 중국동맹회 지도층 간부들이 남양에서 비밀회의를 열고 자금을 모집해 동맹회원 500인으로 결사대를 조직하고 신군(新軍)을 주체로 반청 단체들과 연합해 광저우에서 재차 무장봉기를 일으키기로 계획했다. 봉기에 성공하면 광저우를 근거지로 삼고 군대를 두 갈래로 나누어 북벌하되, 한 갈래는 황싱이 거느리고 호남을 거쳐 우창을 점령하며, 다른 한 갈래는 조성이 거느리고 강서를 거쳐 난징을 점령하기로 했다. 그런 다음 두 군이 회합해 양자 강을 건너 곧장 베이징으로 향하기로 했다.그 해 1910년 10월 황싱, 조성은 홍콩에 봉기조직부를 설립하고 광저우로 사람을 보내 비밀 연락 지점을 38곳이나 세웠다. 이듬해 1911년 3월 5일 황싱과 조성은 봉기 날짜를 3월 15일로 의결했다가 다시 28일로 고쳤다. 황싱과 조성은 광저우에 도착하자 봉기 총지휘부를 설립했는데 무기가 미처 도착하지 않아 봉기를 하루 연기해 29일(4월 27일)에 일으키기로 하고 원래 정해놓은 열 갈래를 네 갈래로 통합하고 각각 광저우의 총독부와 북문,순경교련소,남대문 등을 공략하기로 했다.황화강 사건의 희생자들이 묻힌 72열사들의 묘.3월 29일 오후 5시 반에 황싱이 100여 명의 선봉대를 이끌고 봉기를 일으켰는데, 나머지 세 갈래 봉기군은 이런저런 이유로 거사하지 못하고 신군도 성 밖에 막혀 들어오지 못했다. 황싱은 자신이 이끄는 100여명을 거느리고 계획대로 총독부를 점령했으나 신임 총독 장명기가 이미 도주해 총독부에 불을 지르고 나오다 수사제독(水師提督) 이준(李準)의 친병대대에 맞서 시가전을 벌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대오를 흐트러뜨리고 말았다. 황싱은 이 전투에서 오른쪽 손가락을 두 마디나 잘렸으나 완강히 싸우다 후에 그의 처가 된 서종한의 권고에 못 이겨 의복을 갈아입고 그녀의 호위 아래 홍콩으로 몸을 숨겼다.이 봉기도 실패해 봉기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붙잡혀 살해된 사람까지 모두 86명이었다. 4일 후 유지인사들이 나서서 희생된 사람들의 시체를 72구 찾아 황화강(黃花岡)이라는 곳에 집단 안장했는데, 이를 황화강 72열사라고 부른다.[23]말레이 반도에서의 혁명활동1911년 12월 16일, 쑨원과 그의 군사 고문 호머 리 (Homer Lea, 荷馬李)는 싱가포르의 골든벨 맨션 (Goldenbell Mansion)에 머물렀다. 이 기간은 쑨원이 우창봉기 소식을 듣고 미국->유럽을 경유해 싱가포르에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기간이다. 말레이 반도에서의 혁명 활동은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서 이루어진 신해혁명과 관련된 활동을 가리키는데, 쑨원은 1906년부터 1910년 기간동안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해외에서의 자금을 얻기 위한 활동과 혁명사상 전파 활동을 하였다. 이 무렵 말레이 반도는 중국 본토를 제외하면 화교의 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었으며, 화교의 경제적 위치도 크게 성장하고 있었다. 쑨원은 수차에 걸쳐 말레이 반도를 방문해 현지의 화교들에게 혁명에 참가할 것을 호소했고 화교 다수에게서 조언을 얻는 등 화교들에게 혁명을 호응받았으므로 말레이 반도는 혁명 운동의 주요 활동 지역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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