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3세 업적과 평가
프리드리히 3세는 국가가 국민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고 믿었다.[33][71] 그는 오랫동안 자유주의적 영향을 깊게 받아왔으며 즉위 전에는 그의 생각과 의사를 빅토리아나 다른 사람들과 줄곧 피력해왔다. 프리드리히는 영국의 의회 제도와 장인인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앨버트 공에게 감명을 받아,[45][72] 아내인 빅토리아와 함께 공동으로 통치하며 친자유주의적 인사를 장관에 임명하여 독일의 자유화를 꾀했다.[73] 부부는 제국수상실의 권한을 크게 축소하고,[64] 영국의 자유주의적 요소를 받아들여 독일을 재편하기를 희망하였다. 윌리엄 하벗 도슨(William Harbutt Dawson)이나 에리히 에익(Erich Eyck)같은 많은 역사가들은 프리드리히 3세의 이른 죽음이 독일 제국 내 자유주의 세력의 발전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평가하였다.[8] 그들은 만약 프리드리히의 몸 상태가 좋아 더 오래 재위했더라면, 독일을 개혁하여 자유민주주의적인 국가로 탈바꿈시키고, 전쟁으로 나아가는 군사적 행보를 저지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62][74][75] J. 맥컬러프(J. McCullough)는 프리드리히 황제가 계속 살아 있었다면 제1차 세계 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더불어 바이마르 공화국도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라 주장했다.[75] 오히려 마이클 밸포(Michael Balfour)같은 여러 역사가들은 제1차 세계 대전이 종전 직후, 세계의 판도에 영향을 주었던 것처럼 자유주의적 성향의 프리드리히 황제가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 또한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 덧붙였다.[76] 작가인 마이클 프론드(Michael Freund)는 프리드리히 3세가 더욱 오래 살았다면 더 나아가 두 세계 대전 모두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 평가했다.[77] 프리드리히 3세의 생애와 치세를 평가한 역사학자 프랭크 팁튼(Frank Tipton)은 “만약 빌헬름 1세가 일찍 죽었거나 아니면 프리드리히 3세가 더 오래 살았다면 독일은 어떻게 바뀌었을까?”라는 추측을 하기도 했다.미국의 매거진 〈퍽〉(Puck)이 자유주의적 군주인 프리드리히 3세의 죽음을 애도한 만평.그러나 빌헬름 몸젠(Wilhelm Mommsen)이나 아서 로젠버그(Arthur Rosenberg) 등의 역사가들은 프리드리히가 오래 재위했더라도 독일은 자유화되지 않았을 것이라며 비판적으로 평가한다.[8] 그들은 프리드리히가 독일을 개혁하기 위해 부황 빌헬름 1세나 비스마르크에 감히 대항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프리드리히 역시 전형적인 군인으로서 호엔촐레른 왕가의 군대식 가풍에 익숙했고 열 살때에는 육군에 임관하자 아버지인 빌헬름에게 기쁘게 임관신고를 하기도 했다.[1] 안드레아스 도팔렌(Andreas Dorpalen)은 생애 초반에 아버지 빌헬름 1세와 비스마르크가 수립해온 정책들을 준수했기 때문에 자신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려 하지 않으려 했다고 지적하였다.[72][79] 로젠버그에 따르면, 프리드리히가 비록 자유주의적 성향을 지녔으나 비스마르크와 그가 수립한 제도를 굳게 신뢰하였고,[80] 도팔렌은 더불어 프리드리히 3세의 재위기간의 장단을 떠나, 독일에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기에 프리드리히는 너무 약했고 능력 또한 한계가있었다고비판하였다.제임스J.시한(JamesJ.Sheehan)은 당시 독일의 정치적 환경과 정당 제도가 매우 보수적이라, 프리드리히가 자유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이를 극복하기엔 험난했다고 지적했다.[82] 도팔렌은 또한 프리드리히 사후 독일의 진보주의 세력이 자유주의 운동을 이어나가기 위해 자유주의자로서의 프리드리히의 이미지를 과장했을 수도 있다고 진단하였고,[83] 빌헬름 2세가 저지른 여러 실책들이 반사 작용으로 부황인 프리드리히 3세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고 말했다.빌헬름 2세를 포함한 프리드리히 3세의 자녀들은 여러 정치적 지위를 맡으며 유럽에 큰 영향을 끼쳤다. 부황과는 반대로, 빌헬름은 전쟁의 참상을 겪어보지 않았고, 비스마르크의 엄격한 지도 아래 호엔촐레른 황가의 군대식 가풍을 이어받으며 자랐다. 프리드리히 황제와 빅토리아 황후의 친자유주의적 사상을 경계한 비스마르크 제국수상은 빌헬름과 프리드리히, 빅토리아 부부간의 갈등을 더욱 부추겨야 한다고 느꼈다.[85] 빌헬름은 그의 부모가 줄곧 행정부로부터 업신여기는 것을 목도하며 자랐고, 부황 프리드리히가 사망한 뒤에는 조부인 빌헬름 1세의 뒤를 따를 것이라고 천명하며 아버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86] 빌헬름 2세는 아버지의 모든 정책과 사상 등을 폐기하고 결과적으로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을 맞닥뜨리게 된다.그러나 빌헬름 2세를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여 역으로 프리드리히와 빅토리아의 권한을 약화시키려 했던 비스마르크의 계획은 결과적으로 그의 몰락을 가져오게 된다. 빌헬름 2세는 부황인 프리드리히 3세와 같이 제국수상이 너무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 권한을 황제가 가져와 더욱 강력한 황제권을 행사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12]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2세가 자신을 경질할 때 그는 이미 모든 권한과 그가 자신의 집권을 위해 뽑은 많은 인재풀을 이미 잃었다. 비스마르크는 빅토리아 황태후에게 아들인 황제를 대신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 줄것을 주문하였지만 비스마르크의 당여들은 자신들이 빌헬름 1세와 프리드리히 3세의 재위 기간 내내 업신여기던 사람들에게서 압력을 받고 있었고, 비스마르크는 경질 당시 부하들의 두터운 신망과 충성심을 얻지 못했다. 영국의 총리를 역임한 제3대 솔즈베리 후작 로버트 개스코인세실은 빅토리아 여왕에게 “프리드리히 황제가 즉위할 때 빌헬름 황태자를 앞세워 스스로의 권한을 강화하려 했던 비스마르크의 정치적인 수가 결국 그의 퇴진을 가져오는 능력이 되어버렸다”라고 말했다. 동정심과 승리감이 뒤섞인 상태였던 황태후는 비스마르크에게 비록 자신이 빌헬름 황제에게 영향력을 행사해도, 비스마르크가 스스로 무너뜨린 것들로부터 그를 구해줄 수 없다고 답했다.프리드리히 3세를 위해 지어진 교회로는 베를린에 있는 프리드리히 황제 기념 교회(Kaiser-Friedrich-Gedächtniskirche)와 쾨니히스베르크의 칼트호프 교회가 있으며, 캐나다의 브리티시컬럼비아 해안 저비스 강 근처에는 그의 이름을 딴 프레더릭 윌리엄 산이 있다.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하네스 케플러 《우주구조의 신비》 (0) | 2020.02.16 |
---|---|
요하네스 케플러 (0) | 2020.02.16 |
프리드리히 3세 황태자 시절, 그리고 짧은 치세 (0) | 2020.02.16 |
프리드리히 3세 결혼과 가족 (0) | 2020.02.16 |
프리드리히 3세 (독일 황제) (0) | 2020.0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