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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3세 황태자 시절, 그리고 짧은 치세

1871년, 프랑스와의 일전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은 독일의 군국들을 한데 모아 독일 제국을 성립하였다. 빌헬름 1세는 새로운 제국의 수장인 황제가 되었고, 프리드리히 왕세자는 독일의 다음 황위를 이을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비록 빌헬름 1세는 황제에 즉위한 날을 자신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슬픈 날이라 회고했으나, 프리드리히는 독일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 중 하나를 지켜보며 흥분했다.[12] 제국수상이 되어 독일의 행정을 총괄하게 된 비스마르크는 프리드리히를 좋아하지 않았고 황태자와 빅토리아 황태자비의 자유주의적 성향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부황과 비스마르크와는 반대로, 프리드리히 황태자는 제국의 자유주의 세력을 계속 지지하여[44] 군비와 군대 확장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45] 황태자는 또한 여러 공공 사업에도 관여하였는데포츠담근처의도시인보른슈테트(Bornstedt)에 여러 학교와 교회를 건설하는 일을 감독하기도 했다.[46][47] 또한 빌헬름 1세는 수도 베를린을 거대한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길 원하였는데, 프리드리히는 아버지의 이러한 정책을 지지하였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국립박물관장의 직책을 맡아 여러 진귀한 미술품들을 사들여 전시했다.이 때 프리드리히가 모은 미술품들은 훗날 그의 죽음 이후 프리드리히 황제 박물관으로 옮겨져 이 곳에서 전시되었다.[48] 1878년, 부황 빌헬름 1세가 암살미수 사건으로 부상을 입어 국사를 전담할 수 없게 되자, 프리드리히는 잠시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빌헬름 황제의 병세가 호전되자, 황태자는 다시 권좌에서 내려와 제2선에 머물렀다. 프리드리히의 미약한 존재감은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으며, 한편으로는 자살까지 생각하게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프리드리히 3세의 포스트 모르템 사진.독일의 진보주의 세력은 빌헬름 1세가 사망하고 프리드리히 황태자가 황위를 이어받으면 자유주의의 새 시대가 올 것이라 단언하였다.[45][49] 그러나 보수적이고 비스마르크를 굳게 신임하던 빌헬름 1세는 오래 황위를 지켰고 1888년 3월 9일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새로 즉위할 프리드리히에게 존호를 정하는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원칙적으로 보자면 프리드리히는 새로이 개국한 독일 제국의 두 번째 황제였던 만큼 프리드리히 1세 또는 독일 제국을 신성 로마 제국의 연장선상으로 놓고 본다면 프리드리히 4세로 정했어야 했고 그는 후자를 선호했다. 그러나 제국수상인 비스마르크가 프리드리히 4세라는 존호는 정통성 시비에 휘말릴 수 있다고 주장하자,[주 1] 독일 제국을 프로이센 왕국의 연장선상으로 보고 프리드리히 3세로 정하였다. 새 황제가 즉위할 때 그의 나이는 56세였으며 후두암을 앓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병에 대해 “이 지독하고 구역질나는 병에 걸린 걸 생각하면... 난 나의 조국을 위해 내 능력을 발휘할 수 있길 간절히 바랬다.”라며 절규하였다.[50] 치료와 함께 프리드리히는 논란을 빚은 의학적 소견을 받게 되었다.[51][52] 황제의 주치의인에르스트폰베어그만(Ernst von Bergmann)이 후두를 완전히 제거하자고 제안하였으나 그의 동료인 루돌프 피르호는 반대하였다.[53] 또한 이 수술은 아직 살아있는 환자를 상대로 집도된 적이 없었다.[54][주 2][55][56][57] 영국의 의사 모렐 매켄지(Sir Morell Mackenzie)는 프리드리히의 증상을 암으로 진단했고[58] 기관절개를 제안하여 프리드리히와 황후인 빅토리아의 동의를 이끌어냈다.[52] 1888년 2월 8일, 부황 빌헬름 1세가 세상을 떠나기 한달 전, 기관절개용 튜브가 프리드리히의 기도에 삽입되었으나,[59] 프리드리히가 네달 뒤 세상을 떠날때까지 그는 말을 할 수 없었고 오직 글로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었다.[60] 수술 집도 도중, 베어그만 박사가 기관지 절개를 하지 않은 채 튜브를 잘못된 부위에 삽입하여 자칫 프리드리히를 죽일 뻔 했다.[52] 프리드리히는 기침과 각혈을 시작하였고 베어그만은 환부에 검지손가락을 갖다대어 더욱 번지게 만들었다. 출혈은 두 시간만에 멈췄지만, 베어그만의 이러한 행동은 결국 프리드리히의 목에 농양이 생겨 프리드리히 3세가 죽을 때까지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59] 뒷날 프리드리히는 베어그만에게 왜 자신의 목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었으며[59] 베어그만이 자신의 병세를 잘못 진단했다고 불평하였다.비록 병세는 점점 악화됨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리히 3세는 황제로서의 책무를 다하려 노력하였다. 즉위 발표 직후,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정장에 박혀있는 검은 독수리 훈장을 빼서 아내 빅토리아의 드레스에 달아줬는데, 이는 빅토리아를 황후로 높이겠다는 뜻을 천명한 것이었다.[61] 프리드리히는 재위 기간 동안 장모인 빅토리아 여왕과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국왕 오스카르 2세의 공식 예방을 받았고, 차남인 하인리히와 조카딸인 이레네 공주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였다. 그러나 프리드리히의 재위 기간은 고작 99일이었고,[62] 이러한 짧은 치세로 인해 괄목할 만한 변화를 또한 가져오지 못했다.[63] 즉위 직전 그가 발표한 칙령에서는 헌법에 따라 황제와 제국수상의 권한을 제한할 것을 약속하였으나 이 칙령은 끝내 시행되지 못했다.[64] 6월 8일에는 프로이센 내무장관 로베르트 폰 푸트카머가 제국의회 선거에 관여해 온 사실이 드러나자, 그를 경질하였다. 매켄지 박사는 프리드리히가 황제로서의 책무에 대해 압도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고 회고했다.[65] 빅토리아 황후는 프랜시스 네이피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황제께선 회의에도 참석하시고 매우 잘하고 계시며 여전히 시도는 하시지만 아직도 말을 하실 수 없다”라고 썼다.[66] 열정이 넘쳤으나 자신이 뜻하던 바를 성취시킬 시간은 많지 않았던 프리드리히는 1888년 5월에 “난 아직 죽을 수 없다... 이제 독일은 어떻게 될 것인가?”라고 절규하였다.포츠담에 위치한 황제 프리드리히 영묘. 프리드리히 3세는 이 석관에 안장되었으며 관 위에는 그를 본딴 석상이 누워져 있다.프리드리히 3세는 1888년 6월 15일에 사망하고, 29세의 황태자 빌헬름이 다음 황위를 이어받으니 빌헬름 2세이다. 프리드리히는 포츠담에 있는 평화 교회의 왕실 납골당에 안장되었다.[68] 프리드리히 사후, 영국 총리를 지낸 윌리엄 글래드스턴은 그를 “독일 자유주의의 바르바로사”라고 평하였다.[69] 빅토리아 황태후는 작고한 남편의 자유주의 사상을 독일에 전파하려 노력하였으나, 이후 어떠한 정치적 권한도 손에 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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