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라틴어:NicolausCopernicus / 폴란드어: Mikołaj Kopernik 미코와이 코 페르니크[*] / 독일어: Nikolaus Kopernikus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문화어: 미꼴 라이 꼬뻬르니끄, 1473년 2월 19일 - 1543년 5월 24일)는 당시 진리처럼 믿어온 지구중심설(천동설)의 오류를 지적하고 태양중심설(지동설)을 주장하여 근대 자연과학의 획기적인 전환,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을 가져온 폴란드의 천문학자이다. 여러 가지 이름 표기는 그가 태어난 곳(폴란드)과 그의 모국어(독일어) 그리고 그가 즐겨 쓴 라틴어를 감안하여 세 가지 언어로 표기한다. 인공원소 코페르니슘의 이름이 코페르니쿠스의 이름을 따 지어졌다. 그는 라틴어, 폴란드어, 독일어, 그리스어, 그리고 이탈리아어를 모두 말할 수 있었다. 코페르니쿠스는 현재의 폴란드 중북부에 있는 당시의 한자동맹 도시인 토룬(폴란드어 Toruń, 독일어 Thorn)에서 관리이자 주철 업을 하는 아버지 니콜라스 코 페르니크 과 당시의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지방 출신인 어머니 바르바라 바첸 로데 사이에서 네 명의 자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열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잃고 외삼촌 밑에서 여의고 토룬에서 초등 및 중고등학교를 다닌 후 코페르니쿠스는 1491년 당시 독일의 작센에 속했던 폴란드 남부지방의 대도시 크라카우(현 크라쿠프)로 가 대학에 입학하여 1494년까지 수학 및 천문학을 공부하다. 대학을 졸업한 후 1495년 이탈리아의 볼로냐로 가 삼촌의 권유로 신학과에 입학한다. 이탈리아에 머무르면서 코페르니쿠스는 또한 로마 및 파도바 대학에 등록하여 강의를 들은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근거하여 논의에만 몰두하던 스콜라학의 학문적 전통을 따르지 않고 천체관측과 궤도 계산을 위주로 하던 실지 천문가였다. 코페르니쿠스가 등장하기 전에는 고대 그리스에서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성질에 대한 통념이 기본적으로 변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의 등장으로 암흑기에서 과학혁명으로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지구와 태양의 위치를 바꿈으로써 지구가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님을 천명했는데, 이것은 당시 누구도 의심하지 않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체계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도전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인간은 그 위에 사는 존엄한 존재이며 달 위의 천상계는 영원한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중세의 우주관을 폐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코페르니쿠스가 행했던 인간 중심의 지구중심설에서 객관적인 입장의 태양중심설로의 발상의 전환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이른다. 흔히 대담하고 획기적인 생각을 이르는 말로 쓰이기도 하는데, 그만큼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었다. 이탈리아 유학시기에 접한 플라톤주의와 고대 문헌 조사의 영향으로 태양중심설을 구상하게 된 코페르니쿠스는 레기오몬타누스가 쓴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 대한 핵심적 문제제기가 실린 책 <요약>을 접하고 자신의 우주 모델에 대한 개략적인 생각을 더욱더 발전시켜나갔다. 그 후 1510년에 태양 중심의 천문 체계의 기본적인 틀을 완성했으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짧은 해설서 Commentariolus>라는 제목이 붙은 짧은 요약본 형태의 원고를 지인들에게 돌렸다. <짧은 해설서> 발표 후 코페르니쿠스는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1543년《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를 발표한다. 우주와 지구는 모두 구형이며 천체가 원운동을 하는 것처럼 지구도 원운동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행성을 하나, 하나 따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태양을 중심으로 한 행성 체계로 보아 행성 간의 관계를 부여함으로써 프톨레마이오스의 모델과 큰 차이점을 두었다. 책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은 매우 미약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널리 퍼져 나갔다. 1616년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금서목록에 추가되기도 하였으나 후대에 이르러 천문학과 물리학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줌으로써 혁명적 씨앗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관측 결과와 완전히 부합한 것은 아니어서, 이후 많은 과학자들. 특히 케플러, 갈릴레이, 뉴턴 등에 의해 수정되고 보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크라쿠프 대학의 예술 과정에서 4년간 공부한 뒤 학위를 받지 않고 1495년 가을, 대학을 떠났다. 그의 외삼촌 바첸 로데는 1489년에 바르 미아의 대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는 사실상 그곳을 다스리는 통치자였다. 1495년 코페르니쿠스가 외삼촌을 만나기 위해 프롬보르크에 도착했을 때, 바르 미아 가톨릭 대교구 참사회 위원 중 한 명이 사망했다. 바첸 로데는 그 자리에 니콜라우스를 임명하려 했다. 바티칸의 허락을 받은 뒤, 코페르니쿠스는 그 해 여름 참사회 회원이 되었다. 다음 해, 바첸 로데의 뒤를 이어 성직자가 되기 위해 코페르니쿠스는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에서 교회법을 공부하게 되었다. 모든 자금은 바첸 로데가 지원했다. 코페르니쿠스가 공부한 교회법은 판사의 권한, 판결을 내리는 과정과 규정, 성직자들이 성사를 행하고 재산을 소유하는 것에 대한 권리와 의무, 결혼에 대한 모든 법률과 규정, 여러 범법 행위에 대한 처벌 등에 대해 교회의 운영과 관련시켜 내린 판결들을 모아놓은 것이었다. 성직자들에게는 일반적인 법이 아닌 교회법이 적용되었다. 볼로냐에서 공부하던 무렵, 코페르니쿠스는 참사회 회원으로서의 권리를 입증하는 공증서를 받은 뒤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가 다시 천문학에 몰두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1497년 초, 코페르니쿠스는 도메니초 마리아 다 노바라는 볼로냐 대학의 천문학교수의 집에서 하숙했다. 그는 노바라의 천문학 관측을 도우면서 천문학적 지식을 넓혀갔다. 또한, 그는 레기오몬타누스의 <알마게스트의 발췌본>을 공부했다. 1500년 여름, 코페르니쿠스는 볼로냐 대학에서 4년 동안의 법률 공부를 마치고 로마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에서 돌아와, 1501년 6월 말, 그는 프롬보르크에서 열린 바르 미아 가톨릭 대교구 참사회로부터 2년 동안 더 공부할 수 있도록 허가받았다. 1501년 10월, 코페르니쿠스는 파도바 대학의 의학 과정에 등록했다. 대학의 의학 강의는 2세기 무렵 로마의 의학자인 갈레노스의 저술을 바탕으로 했다. 2년 동안의 학업이 끝나고 1503년 5월 31일, 코페르니쿠스는 볼로냐에서 멀지 않은 페라라 대학에서 교회법 박사 학위를 받았다.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천문 학기 원전 고대 그리스의 에우독소스와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구중심설을 주장했다. 에우독소스는 지구를 중심으로 여러 층의 천구가 겹쳐진 모습의 우주를 상상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달을 기준으로 지상계와 천상계를 명명하였다. 태양중심체계를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은 기원전 3세기 사모스 의아리 스타 르코스(Aristarchos, 310?~230B.C.)이다. 그는 저서 『태양 및 달의 크기와 거리에 대해서』에서 태양은 지구에 비해 6~7배 더 넓고 그 크기는 지구의 300배에 달한다고 서술하였다. 그는 태양이 지구보다 크기 때문에 태양의 연주 운동은 지구의 공전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항성의 일주운동은 지구의 자전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아리스타르코스의 태양중심설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 중 하나로는 당시의 과학기술로는 별의 시차에 의한 효과를 관측할 수 없었던 것이 있었다. 기원전 3세기 무렵의 아폴로니우스와 기원전 2세기의 히파르코스는 행성이 단순히 원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원 위에 있는 작은 원 위를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이 작은 원을 주전원, 큰 원을 대원이라고 부른다. 두 가지 이상의 원운동이 합해져 행성의 진행방향이나 속도가 변화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것으로 행성의 접근에 의한 밝기 변화, 순행과 영행의 속도 차이를 대략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각각의 행성들을 관측해 보면, 이들은 항성들을 배경으로 동쪽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일 년에 한 번 정도 각각 다른 시기에 잠시 정지했다가, 몇 주 동안 서쪽으로 움직인다. 이런 현상을 ‘역행 운동’이라 부른다. 서기 150년 무렵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는 이런 역행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기하학적 모델을 제시했다. 그의 모델은 두 개의 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큰 원은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모원’이다. 작은 원은 모원에 의해 운반되는 ‘주전원’이다. 행성은 주전원을 따라 돈다. 프톨레마이오스에 따르면, 이 두 원운동을 결합함에 따라 행성이 모원 속으로 들어가 지구에 가장 가까웠을 때,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에 따르면, 태양은 원궤도를 따라 일정한 속력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그 원의 중심은 지구의 중심과 일치하지 않았다. 그 원은 지구에서 태양까지 거리의 약 3.5 퍼센트 정도 거리만큼 떨어진 곳에 놓여 있는 이심원이었다. 그는 태양이 이 이심원 궤도를 일 년에 한 번 회전하며, 이심원 궤도 자체가 지구 둘레를 하루에 한 번 회전하는 것으로 보았다. 즉, 이심원 궤도는 별들에 대하여 고정된 상태로 있으며, 태양의 이심원 궤도, 행성들의 궤도가 지구에 대하여 하루에 한 번 회전하는 것이다. 13세기 초, 영국의 천문학자 존 오브 할리우드는 파리에서 활동하면서 라틴어식 이름인 요하네스 시크 로보스 코라는 필명으로 ‘천구’라는 책을 썼다. 그 책은 기본 교재로써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 책에는 행성들의 운동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다. 그래서 다음 세대인 13세기 중엽이 되자 좀 더 발전된 교재인 캄 파누스가 쓴 ‘행성의 도구’가 등장했다. 이 책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간단한 역학적 방법으로 설명해 놓았다. 14세기 우마이야 왕조의 다마스쿠스에 있던 이븐 알 샤티르(Ibn Al Shatir)는 천동설의 입장에서 동시심을 제거하여 코페르니쿠스와 같은 체계를 생각했다. 원운동에서 직선 왕복운동을 일으키는 방법은 그에 앞서 13세기의 나시르 알 딘 알 투시(Nasir al-din al-Tusi)에 의해 제시되었다. 그들의 업적이 코페르니쿠스에게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지적되지만, 그것을 입증하는 기록은 없다. 15세기 중엽 비엔나 대학의 게오르그 푸르 바흐는 프톨레마이오스의 ‘행성의 도구‘를 새롭게 해석해 새로운 책 ’ 새로운 행성 이름‘을 썼다. 그는 투명한 수정으로 된 틀로 프톨레마이오스의 모원과 주전원을 만들어 보려 했다. 즉, 우주의 구성과 운동을 실제 물질을 사용해 주체적으로 표현해 보려 한 것이다.
이야기
-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2020.02.18
- 기황후 2020.02.18
- 웹툰의 연출 사업 2020.02.18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기황후
고려 출신 환관 고용보(高龍普)의 주선으로 황궁의 궁녀가 되었다가 원 혜종의 총애를 얻어 귀비로 책봉되고, 훗날 혜종의 뒤를 이어 황제로 등극하는 아들 아유르시리다르를 낳았다. 정적 관계였던 제1황후인 다나 슈리가 역모죄로 사사되자 외국인은 정궁으로 삼을 수 없다는 재상 바얀의 반대를 견뎌내고 제2황후가 되었고, 1365년에 제1황후인 콩기라트출신의 바얀 쿠툭가 사망하자 정궁 황후로 등극하였다. 이후 아들 아유르시리다르를 황태자로 옹립하였고, 휘정원을 자정원(資政院)으로 개편해 심복인 고용보를 초대 자정 원사(資政院使)에 임명한 뒤 고려인 출신 환관과 고려인 출신 관리 및 일부 몽골 관료들을 포진시켜 자신의 친위대로 삼았다. 친정인 기 씨 일족을 통해 고려 왕실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얼마 못 가 사라졌다. 공민왕에 의해 친오빠 기철 등이 살해되자 원 혜종을 사주하여 충선왕의 서자 덕흥군을 왕으로 앉히고 고려를 침공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태자인 아유르시리다르의 비(妃) 역시 고려 여인으로 정하여 권 씨(權氏)를 태자비로 삼았다. 고려의 공녀 차출 원나라에서는 해마다 고려에 공녀를 차출해갔다. 그런데 공녀의 명단에 그가 있었다. 목은 이색은 "공녀로 선발되면 우물에 빠져 죽는 사람도 있고, 목을 매어 죽는 사람도 있다"라고 말할 정도로 비참한 상황이었다. [3] 그러나 그녀는 침착했고 오히려 걱정하는 자신의 친정 부모를 위로하였다. 자원한 공녀 길은 아니지만 이왕 뽑힌 이상, 이를 새로운 인생의 계기로 삼겠다고 결심했다. 세계를 지배하는 원나라이니 만큼 더 많은 기회가 있으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3] 공녀로 원나라에 가게 되어 대도의 황궁에 도착하였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그는 원나라 생활 중 부처에게 기도하였다. 이때 고려인 출신 내시 고용보(高龍普)를 만나게 된다. 원 황실에 포진한 고려 출신 환관들의 대표였던 고용 보는 기 씨 소녀 같은 인물이 꼭 필요했다. 기 씨 소녀라면 황제 원 혜종을 주무를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고 그녀를 적극 추천하여 혜종의 다과를 시봉 하는 궁녀로 만들었다. 후궁 생활 원대의 대도 1333년(충숙왕 복위 2) 고려인 내시 고용보의 추천으로 황태자궁에 배치되고, 원 혜종의 눈에 띄게 되어 승은을 입게 된다. 원 명종의 장자였던 토곤 테무르(혜종)는 1330년 7월 한때 원 황실 내부의 싸움에 패배해 인천 서쪽 대청도에 유배된 적이 있었다. 1년 5개월을 대청도에서 보낸 그는 원나라로 돌아가 2년 후에 황제에 즉위한다. 동아시아에서 동유럽에 이르는 세계제국의 후계자에서 고려의 작은 섬에 유배되었던 기억은 어려운 시절에 대한 향수와 어우러져 기 씨에 대한 호감으로 작용했다. [3] 원 혜종의 이러한 호감은 기 씨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기 씨는 혜종을 통해 자기 뜻을 펼치기로 마음먹었다. 다나 슈리는 채찍으로 기 씨를 매질하고 인두로 지질 정도로 질투가 심했으나, 기 씨는 좌절하지 않았다. [3] 그녀는 원 혜종을 내세워 다나 슈리와 싸웠다. 다나 슈리의 친정에 불만을 갖고 있던 원 혜종은 기 씨의 의도대로 1335년 승상 바얀과 손잡고 다나 슈리의 친정을 황제 역모사건에 연루시켜 제거했다. [3] 그리고 다나 슈리는 유배 가는 길에 승상 바얀에게 독살당한다. 황후와 황자 출산 1339년 황자 아유시리다라를 낳았다. 이전의 황후 다나 슈리가 텡기스의 반란으로 1335년 폐위된 후 기 씨를 황후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실권자 메르키트 바얀이 그것을 반대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원 혜종을 조종해 바얀의 축출을 기도했고, 황제를 찾아가 통곡하며 바얀과 궁궐 내 그의 심복들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주장하였다. 기 씨의 하소연을 들은 혜종은 자신의 스승 사라판과 손잡고 바얀을 탄핵,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1340년 2월 메르키트 바얀(伯顔) 세력이 숙청된 뒤 4월 드디어 제2황후로 책봉되었다. 그녀가 제2황후로 되면서 친정아버지와 할아버지, 증조부에게 왕(王)의 작위가 추증된다. 아버지 기자오(奇子敖)는 처음에 영안 왕(榮安王)으로 봉하고 후에 추봉하여 경왕(敬王)이고, 할아버지 기관(奇琯), 증조부 기홍영(奇洪潁) 시호는 미상이다. 원 혜종은 특별히 한림학사를 보내 기자오의 묘비를 지어주었다. 어머니는 영안 왕 대부인(大夫人) 작위를 받았고 기철은 원나라의 관직과 함께 고려의 정승으로 임명됐다. 더불어 기철은 덕성부원군, 동생 기원은 덕양군에 봉해졌다. [4] 기 씨의 성공에는 고려 출신들을 주축으로 철저하게 현지화 전략을 펼친 것이 주효했다. [3] '원사(元史)'는 그녀가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먼저 칭기즈 칸을 모신 태묘(太廟)에 바친 후에야 자신이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현지화 전략으로 명분을 축적하면서 원의 황실을 장악했던 것이다. 황후가 된 뒤 곧 반대세력을 몰아내고 휘정원을 자정원(資政院)으로 이름을 바꾸고 여기에 고려인 출신 환관과 고려 유민, 고려인 유학생들을 등용하여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며, 이를 배경으로 자신의 친위대로 활용하게 된다. 그녀는 흥성궁(興聖宮:현 베이징 중남해 자리)에 거주하면서 황후 부속기관인 휘정원을 자정원(資政院)으로 개편해 심복인 고용보를 초대 자정 원사(資政院使)로 삼았다. [3] 자정원은 기황후를 추종하는 고려 출신 환관들은 물론 고려인 출신 관료들, 몽골 출신 고위관리들도 가담해 자정 원당'이라는 강력한 정치세력을 형성했다. 선정과 대규모의 아사 사건 그녀는 고려 출신 환관 박불화(朴不花)를 이용하여 황제 혜종에게 아유시리다라를 황태자로 책봉하도록 압박하였고, 1353년, 마침내 아유시리다라는 황태자가 되었다. 또한 그녀는 고려 출신 환관 박불화를 군사 통솔의 최고책임자인 추밀원 동지 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만들어 군사권까지 장악했다. 공녀였던 그녀는 힘없는 백성들의 고초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원사 후 비열 전’은 1358년 북경에 큰 기근이 들자 기황후가 관청에 명해 죽을 쑤어주고, 자정원에서는 금은 포백·곡식 등을 내어 십여 만 명에 달하는 아사자의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규모 아사자가 발생하는 것은 원제국의 위기였다. [3] 그때, 원나라 내부에서는 황태자의 지지자와 반대자 사이에 내전이 있었고, 반 황태 자파의 지도자 볼루드 테무르는 결국 1364년 수도 대도를 점령하였다. 아유시리다라는 황태자 지지자인 코케 테무르(擴廓 帖木爾)에게 달아났지만 기황후는 볼루드 테무르의 포로가 되었다. 고려와의 갈등 당시 고려는 30여 년간 원나라의 침략에 맞서 항쟁하다가 항복함으로써 직접적인 합병은 면하였지만 사실상 원나라의 속국이 된 상태였다. 기황후가 제2황후가 되면서 그녀의 오빠 기철은 고려에서 당대의 대표적인 권문세족으로서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 기철은 친원파들과 함께 4차 입성 책동을 주도해 원이 충혜왕을 퇴위시키도록 하는 등 고려의 국정을 농단하는 한편 전횡을 일삼았고, 이에 공민왕은 원의 영향력이 약해진 1356년 기철 일족을 비롯해 친원파를 대대적으로 제거했다. 기황후는 집안의 멸족 소식을 접하고 극도로 분노하였다. 그녀는 원 혜종을 설득하여 공민왕에 대한 복수를 요구하였고, 1364년(공민왕 13년) 원나라 황제는 공민왕을 폐하고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왕으로 책봉했다. 그러나 고려가 이를 따르지 않자 기황후는 덕흥군에게 원나라 군사 1만 명을 주어 고려 정벌을 명했고, 이들은 평안도 지방까지 진출하였으나 최영·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에 대패했다. 제1황후 책봉과 최후 1365년 9월 7일, 제1 황후인 옹기라트 출신의 바얀 후투그가 죽은 후에 기황후는 1365년 12월, 제1황후가 되었다. 이는 이민족 출신을 황후로 책봉하지 않는 원나라의 전례를 깨뜨리고 정후가 된 것이었다. 하지만 기황후와 자정 원당에 질린 혜종이 기황후를 정후로 책봉하기를 머뭇거렸는데, 이에 기황후는 바얀 후투그가 관리했었던 중정원까지 자정원에 포함시키고 이름도 숭정원으로 개편하여 더욱 세력을 키워 혜종을 압박한다. 결국 그렇게 기황후는 정후로 책봉된다. 하늘 아랫사람의 도리로 부부만 한 것이 없다. 황후는 천하의 어머니로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를 내조하는 것 또한 고금의 도리다. 이제 그대 솔롱고 씨(肅良合氏)[5]는 천하의 어머니로 공경스럽고도 근검절약하는 행동으로 천하를 이끌고 황가를 빛냈으니, 이제 옥 채옥 보(玉채玉寶)를 내려 황후로 삼노니 더욱 힘써 짐을 보좌하여 영원한 복이 되도록 하라. 원 혜종의 교지 기황후는 고려국 금강산 장안사에 거액의 내탕금(內帑金: 판공비)을 내어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키고 많은 불상을 봉안하였다. [6] 그녀는 특별히 며느리도 고려 출신 여성으로 정하여 권 씨(權氏)를 황태자비로 삼게 했다. 1368년, 주원장의 25만 명나라 대군이 대도를 점령하자 북원으로 전락한 원나라는 응창부(應昌府)로 천도를 하였다. 기황후도 이때 응창으로 이동하였다. 그 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응창은 내몽골 자치구에 있는 타알 호수(Lake Taal)에 위치했었다. 1368년 응창에서 포로가 되고 1369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1370년, 남편인 혜종이 죽고 그의 아들 아유르시리다르가 황좌를 계승한다. 그러나 아들 아유시리다라는 후사를 남기지 못했고 그녀가 친히 간택함 며느리 권황 후는 딸만 1명 낳았다. 이로써 그녀의 후손은 끊어졌다.
사후 기황후 묘 문서도 참고하십시오.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상리(上里) 산 145번지에는 기황후의 묘로 알려진 고분(古墳)이 있다. 그녀의 시신은 고려로 운구되어 경기도 연천현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시신이 언제 고려로 운구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금강산 장안사에는 그녀의 위패가 봉안되어 넋을 기리기도 했다. 경기도 연천군에 안장된 뒤 그녀를 제향 하는 큰 재실 또는 재궁이 있어 그 주변은 재궁동(齋宮洞) 또는 쟁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현재의 연천읍 상1리 신망리역 근처에 해당된다. 인근 상리(上里) 산 145번지에는 기황후 묘로 전하는 묘소가 있다. 그 뒤 실전되었다가 조선 중기부터 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에도 연천현 동쪽에 기황후의 묘소가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졌고, 1656년 사학자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이 편찬한 <동국여지지>(東國與地志)에는 속전 원순 제기 황후 묘(俗傳元順帝奇皇后墓)라 하여 기황후 능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고 있었다. 조선 영조 때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은 연천현 동북쪽 15리에 원나라 순제 기황후의 묘와 석인, 석양, 석물 등이 있다'라고 전한다. 1899년 간행된 연천현 읍지에는 좀 더 구체적인 묘사가 나온다. '황후총은 동쪽 20리 재궁동(齋宮洞)에 있는데, 세속에서 전하길 원 순제 기황후가 고국에 돌아가 묻히기를 원해서 이곳에 장사 지냈다'라고 돼 있다. [7] 기황후 묘소 주변에서 고려 양식의 어글무늬 기와가 많이 발굴되기도 했다. 현재 경기도 연천군에는 연천읍 상1리에 기황후 묘가 존재하고 있으나, 한국전쟁으로 비석과 석물을 잃어버렸고 비지정문화재라 하여 보존 처리되지 않고 있다. 기황후 묘 동쪽에는 마정승 묘(馬政丞 墓)와 이정승 묘(李政丞 墓)로 알려진 고분 2기가 존재한다. 측근이나 가까운 사람들의 묘역으로 추정되나 매장자의 정확한 신분은 알 수 없고 이 고분들 역시 방치되어 있다. 현재 기황후 묘 부근 연못(현재는 매몰됨)에 묻혀있던 석물(석수) 2점을 1998년 연천문화원에서 수습하여 보관하다가 2006년부터 연천문화원 향토사료관 입구에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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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의 연출 사업
컷 구성 – 종스크롤 방식 모니터의 면적이 한정되어 있고, 한 화면에 다 들어오지 않는 것은 브라우저의 스크롤바를 아래로 내리면서 볼 수 있기 때문에 웹툰은 자연히 세로로 긴 형태를 띠게 되었다. 모양, 크기, 구성이 다양하게 존재하여 컷들의 조화를 중시하는 출판 만화와 달리 웹툰식 연출은 상하 스크롤 읽기로, 여러 컷 외에 한 컷씩 보이는 경우가 다수이며, 이는 애니메이션 등의 영상 연출 시 스토리보드의 프레임 형태의 레이아웃에 가깝다. 그러나 이는 여러 컷을 한꺼번에 보는 출판만화보다 한 컷씩 보는 웹툰이 시각적으로 집중도를 높이는 효과를 가져온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컷 구성은 작가의 개성이 잘 반영되는 분야이다. 연속되는 반복 프레임 출판만화 또한 반복 컷을 사용하는 연출이 존재하지만, 이는 한정된 공간의 종이 위에 연출을 하여야 하기 때문에 연속적이고 점진적인 반복 컷을 연출로 사용하기엔 한계가 있다. 이에 비해 웹툰의 경우는 웹의 확장을 통해 점진적이고 연속적인 연출이 훨씬 자유롭다. 이를 통해 웹툰은 직접적이고 역동적인 이미지를 산출하고 있다.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계속 스크롤바를 내리면서 감상하게 되는 웹툰의 성격상 자연적으로 모든 장면이 영화의 틸트 기법을 연출하게 된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틸트란 카메라 헤드를 상하로 부채꼴로 그리며 촬영하는 기법으로서 예를 들어 천신만고 끝에 대기업에 입사된 사람을 보여준 후 카메라를 틸트 업하여 대기업 사옥빌딩의 꼭대기까지 보여준다면 대기업의 위용과 그곳에 근무하게 된 사람의 자신감을 보여줄 수 있고, 반대로 빌딩 옥상의 살인자를 보여준 후 틸트 다운하여 거리에 쓰러진 피살자를 보여주면 두 사람 간의 관계를 나타낼 수 있다. 웹툰은, 성격상 연속적으로 스크롤바의 이동에 맞춰 그림이 컴퓨터 아래에서 위로 흘러가는 형식이라 우리의 눈은 특정 화면의 꼭대기에서 시작하여 점점 더 화면의 아래쪽으로 내려가며 감상하게 되는 형국이 된다. 즉, 어떤 화면도 화면 전체가 한 번에 눈에 들어오지 않으며 언제나 화면 위쪽 부분부터 조금씩 베일을 벗기듯이 아래쪽으로 영역을 넓혀가며 볼 수 있는, 그러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그 장면의 전체가 보이는 형식이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항상 대부분의 컷을 영화의 틸트 기법으로 그려진 화면 혹은 장면으로 보는 셈이 되는 것이다. 양방향 소통 방식 피드백(댓글) 박동숙과 전경란에 따르면, '디지털 서사'란 단순히 컴퓨터와 같은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전달 및 저장할 수 있도록 구성된 서사가 아니라 컴퓨터가 일종의 수행공간(space of performance)의 역할을 하는 서사를 말한다. 기존의 서사는 작가가 완성한 서사를 독자가 전달받는 방식으로 구현되었지만, 디지털 서사는 컴퓨터라는 공간에서 '독자'가 어떤 행위를 수행함으로써 서사의 구성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구현된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포털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웹툰에는 댓글을 달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각 회를 보고 난 뒤 느낀 점이나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은 화제 등을 간단히 적을 수 있는 것이다. 독자들은 댓글을 쓰고 읽으며 때로는 작품에 대해 자신과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사람과 대립하기도 한다. 시사적인 이슈를 유쾌하거나 통렬하게 풍자한 작품에는 칭찬의 댓글을, 작가가 요즘 부진하다 싶은 작품에는 따끔한 질타나 든든한 격려의 글을 남기기도 한다. 실제로 웹툰 작가들은 댓글을 통해 독자의 피드백을 받는다. 댓글을 통한 디지털 서사의 형성은 곧 '작가-> 독자'의 일방향 소통에서 '독자 <->독자', '작가 <->독자'의 다방향 소통으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웹툰 만화가들은 대개 자체적인 수익 창출보다는 급여를 받으면서 원고를 제출하는 방식으로 생활하고 있다. 급여 제공의 주된 주체는 포털 사이트이며, 대표적인 포털로는 네이버와 다음이 있다. 웹툰 시장에서 작가는 포털과 계약관계로 맺어지며 신인 작가의 경우 대부분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나도 만화가’(다음), ‘도전 만화’(네이버)등의 코너를 통해 데뷔를 한다. 작가는 코너에 자신의 작품을 올리고 포털은 조회수가 많은 작품을 선별하여 계약을 하게 되는데, 계약 이후 모니터링 기간을 가지게 된다. 이 기간 동안 포털은 작품의 흥행 여부, 상품가치 유무를 확인하고 작가의 원고료를 산출한다. 네이버의 경우 조회수, 회차, 배경 유무, 분량 등을 기준으로 원고료를 산출하며, 다음의 경우 조회수로 원고료를 산출한다. 네이버와 다음의 경우에는 수십 명 정도의 만화가들을 프로로써 고용, 만화를 무료로 누리꾼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네이버의 웹툰 서비스의 평균 조회수는 300만으로 추측된다. [7] 인기 있는 웹툰의 경우에는 댓글이 5,000개를 넘는 등 웬만한 오프라인 만화가들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웹툰이 무료 콘텐츠로 서비스된다는 점에서 일부 유명 작가를 제외했을 때 만화가에게 직접적인 수익은 현저히 낮은 것이 사실이다. 신인 작가가 네이버·다음·파란 등 주요 인터넷 포털에서 연재를 시작할 경우 최저 고료는 회당 10만∼20만 원선. 각 포털마다 작가의 지명도와 직전 작품의 원고료, 연재 주기, 규모 등의 추가 요인을 합산해 작품 단위 혹은 3개월, 6개월 주기에 한 번씩 원고료를 갱신하는 구조다. [8] 출판사 직영 사이트는 유료 서비스를 통해 수익을 내는 구조이며, 포털사이트는 서비스 매출 이외에 판권료 및 러닝로열티를 받게 된다. 인기 만화의 경우 출판 만화, 캐릭터 상품, 드라마, 영화, 연극 등의 다양한 장르의 콘텐츠로 활용되면서 새로운 수익을 낳는 경우도 있다. 단행본은 작품이 온라인으로 게재된 후 선별되어 출간되며 책값은 대략 9천 원 내외다. 이외에도 작품이 인기를 얻게 되면 2차 시장인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으로 나오기도 하며, 3차 시장인 문구, 완구, 의류 등 상품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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