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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혁명

1900년의 의화단운동 이후 열강들의 침략이 한층 강화하는 가운데 청 조정은 정치개혁을 꾀하는 소위 '신정' 운동을 일으켰으나 납세 거부와 기독교 배척을 위시한 대중운동이 전국으로 번져 입헌군주제를 향한 운동으로 발전하였다.이런 정세하에서 쑨원은 1905년 중국혁명동맹회(중국동맹회)를 결성하고 삼민주의를 제창하는 일변 혁명파를 지휘, 반청(反淸) 무장투쟁을 전개했다.[1] 1911년 청나라가 철도 국유령을 내려 민영이었던 철도를 담보로 열강에 차관을 얻어 재정난을 타개하려고 하자 반대하는 운동이 광범하게 일어나 대규모 무장투쟁인 쓰촨봉기로 결국 발전했다. 이를 계기로 10월 10일 우창에서 신군이 봉기하여 신해혁명의 불길이 당겨져 약 한 달 만에 14 성(省)이 이에 호응하여 궐기했고[2] 12월 말에는 17개 성으로 확대되어 청조에 독립을 선포하였다.[3] 1912년 1월 난징에서 쑨원을 임시 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혁명 주체의 단결력과 세력이 굳건하지 못한 탓에 청조에게 대권을 부여받은 위안스카이와 타협, 선통제의 퇴위로 청을 멸망시키는 데는 성공한 대신 쑨원이 사임하고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이 되었다!.1911년이 신해년(辛亥年)이라서 신해혁명이라고 명명하였다. 이 혁명(제1차 혁명)으로 공화정이 수립됐지만, 곧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이 되면서 이후 제제(帝制)의 야심을 품고 혁명파를 탄압하는 일편 위안스카이의 독재정치가 시작되었는데 1913년 7월 국민당에서 '위안스카이를 타도'하려는 운동하면서 혁명을 호소하여 봉기했다. 이를 제2차 혁명이라고 하나 위안스카이는 군대를 동원해 이를 진압했다.[1] 이후 위안스카이는 1915년 일본의 '21개조 요구' 수락을 위시해 매판성을 드러내어 이런 위안스카이의 독재정치에 민중은 극심하게 반발했는데 이를 ‘제3차 혁명’(호국전쟁)이라고 부르고 1916년 위안스카이 사후 내전과 군벌의 할거로 혼란이 계속되었다.우창에서 최초로 봉기한 10월 10일을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신해혁명 기념일’로, 중화민국에서는 중요 국경일인 “쌍십절”로 기념한다. 신해혁명은 20세기 아시아에서 일어난 정치사에 관계된 중요한 사건으로 간주된다.배경양무운동 양무 운동 문서도 참고하십시오제2차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운동을 계기로 서구의 무기를 주목하게 된 청의 관리들이 1860년대 중반에 부국강병을 목표로 군수산업을 시작했다. 이런 시도는 차츰 민수 부문으로 확산되어 근대 특징이 될 만한 경향이 있는 광공업의 발전, 전신선과 철도 부설, 해군 양성과 유학생 파견, 신식 교육기관 설립까지 광범위하게 서구식 개혁을 도모했다. 양무운동 초기에는 청조가 반란 진압에 성공하여 “同治中興동치중흥”이라고까지 회자됐지만 부국강병의 결과를 결정할 만큼 중요한 양무운동 기간에 있었던 대외 전쟁(1884년 청불전쟁, 1894년 청일전쟁)에서 군사상으로 승리하지 못했으며, 양무 기업 대다수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므로 1894년 청일전쟁에 패할 무렵에는 부국강병이라는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는 평가가 나왔다.양무운동 실패 요인과 한계는 관리의 기업 통제에서 야기되는 부패와 비능률, 자고로 이어져 내려오는 경제구조의 잔존, 운동 추진 주체가 지역에 속하는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점이 주류였다. 특히 개혁을 지향하는 관리들이 지방에 분산된 채 통일하는 계획 없이 사업을 추진했으므로 급변하는 정세 변화에 효율로 대처하지 못한 점이 커다란 문제였다.변법자강운동변법자강 운동 문서도 참고하십시오.캉유웨이청일전쟁을 계기로 양무운동의 파탄이 드러나자 그동안 서구의 정치제도 도입, 즉 제도상 개혁을 주장해 온 변법론이 힘을 얻었다. 변법을 주장하는 하급관리 캉유웨이(강유위)의 개혁 주장이 광서제에게 알려지면서 광서제가 주도하여 1898년 4월 하순에 약 100일에 거쳐 소위 ‘무술변법’ 개혁을 시도하기 시작하였다.[4] 캉유웨이는 본래 부강하려면 서구식 입헌군주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으나 우선 개혁을 추진할 새로운 기구(제도국) 마련에 착수하고자 했다.[4] 그러나 새로운 기구 마련과 개혁을 지향하는 하급관리 임용, 상공업 진흥과 신식학교 개설 등 개혁 구상조차 옛 제도나 관습을 그대로 지키고 따르려는 관리들과 서태후에게는 기득권을 위협하는 행위로 보였다. 특히 ‘자신의 개혁이야 말로 공자의 정신을 계승한 것’(공자개제론)이라는 캉유웨이의 주장은 수구파의 공격을 불러왔다. 결국 변법파가 영국, 일본과 연합하는 외교 방침을 세우고 이토 히로부미가 청을 방문해 광서제를 만나자 서태후 측과 수구파는 정변을 일으켜 광서제를 연금하고 서태후가 訓政훈정을 재개하여 변법자강운동은 실패하였다.의화단운동의화단 운동 문서도 참고하십시오.신축 조약 체결1899년-1900년 기간 산둥 성에서 반기독교 폭동을 계기로 화북 일대에 퍼진 반제국주의 농민 투쟁이 일어났는데, 이를 의화단운동이라 한다. 중심 세력인 의화단은 백련교 일파로 불리는 종교 비밀결사로서 당시 사회 모순, 기독교 전파, 독일 진출에 반감을 품고 '부청멸양'을 부르짖으면서 무력으로써 배외 운동을 전개했다.1899년 산둥 성 서부에서 의화단은 폭동을 일으키고 외국인 특히 기독교도(개신교, 가톨릭, 정교회)를 박해했고 청조에서도 이를 선동해 폭동이 확대하였다.1900년에는 베이징에까지 들어와 관군과 함께 11개국 공사관[주해 2] 을 공격했으나, 영국,러시아,독일,미국,프랑스,일본,이탈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 8개국 연합군에게 격파되었다. 1901년 9월 베이징 의정서의 성립으로 사건은 마무리 되었으나 엄청난 배상금 지불을 포함한 12개 항 조약 내용은 청의 면모를 크게 실추시키면서 식민지화를 더욱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청조의 개혁변법자강운동은 서태후와 수구파 탓에 실패했으나 의화단 운동의 참혹한 결과로 국내상으로는 막대한 세금 징수로 민심의 동요와 불만, 국외상으로는 열강의 이권 침탈 심화가 증폭하여 청 조정은 내정과 외교 총체가 위기에 처하였다. 특히, 상층도 청조에 불만이어서 더는 방치할 수 없는 위기였다. 1901년 1월 청의 실권자 서태후는 “외국의 장점을 취하고 중국의 단점을 버려 부강을 꾀한다”는 방침하에 고위 관료들에게 국정에 관한 의견을 上申상신하라고 명했다. 이를 기점으로 하여 청 정부는 생존하려는 ‘新政신정’을 개시했는데 이를 서태후의 존호인 慈禧자희를 따 ‘慈禧新政자희신정’[주해 3] 이라고 한다. 직례총독 위안스카이, 양강총독 유곤일, 호광총독 장지동이 추진한 신정의 주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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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피르 코롱머

너 피르 코롱머(스코틀랜드 게일어: na fir ghorma [nˠə fʲɪɾʲ ˈkɔrɔ̃mə]) 또는 민치 해협의 시퍼런 남자들(영어: Blue men of the Minch)은 아우터헤브리디스와 스코틀랜드 본토 사이의 해협에 출몰한다는 요괴이다. 배를 침몰시켜 선원들을 익사시키는 물귀신의 일종이다. 이들은 민치 해협과 그 주위 일대에만 전승되는 특이한 요괴들로, 스코틀랜드의 다른 지방에서는 전승되지 않으며, 민치 해협 일대를 제외한 세계 어느 곳에서도 비슷한 요괴를 찾을 수 없다.이들은 인간과 비슷하게 생겼고 덩치도 비슷한데 피부색이 파란 색이라는 점만 다르다. 폭풍우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날씨가 좋을 때는 수면 위에 뜨거나 바로 아래에서 잠을 취한다. 블루맨은 수면 밖으로 몸통만 내놓고 쇠돌고래처럼 자맥질을 해서 움직인다. 또한 언어 구사 능력이 있다. 한 무리의 블루맨들이 해협을 통과하던 배를 발견하면 그쪽을 향해 우르르 몰려들고, 두목 블루맨이 배의 선장에게 시 두어 절을 소리친다. 선장은 블루맨들의 도전에 응답해서 시를 마무리 지어 소리쳐 대답해야 하며, 하지 못한다면 블루맨들이 달려들어 배를 전복시키려 한다.블루맨에 대한 해석으로는 바다의 의인화라는 가설과, 몸에 파란 물감을 칠했던 픽트족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설, 또는 바이킹이 스코틀랜드에 데리고 온 북아프리카 출신의 노예들(투아레그족은 파란 옷을 입고 다녔다)에서 비롯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하일랜드 지방(스코틀랜드 고지대)과 이너헤브리디스 제도는 북쪽에 떨어져 있는 아우터헤브리디스 섬과 민치 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이 민치 해협이 블루맨들의 서식지이다.[1] 사전편찬학자 에드워드 드웰리에 따르면, 블루맨을 가리키는 스코틀랜드 게일어 표현들인 "너 피르 코롱머"(na fir ghorma), "파르 코롱므"(fear gorm), "스루흐 넘 파르 코롱므(sruth nam fear gorm) 들에서 "코롱므"(gorm)가 "푸른색"을 의미하며, "파르"(fear)는 "남자", "너 피르"(na fir)는 복수형으로 "남자들"이라 풀이된다.블루맨을 "스톰 켈피"(storm kelpies)라고 부르기도 한다.[3][4] 켈피는 스코틀랜드 신화에서 가장 잘 알려진 물귀신으로,[5] 보통 말처럼 생긴 물말의 일종으로 생각되지만,[6] 사실 켈피라는 이름은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 다양한 전승과 맥락에서 다르게 사용된다.[5] "켈피"(kelpie)란 "어린 암소" 또는 "수망아지"를 뜻한 스코틀랜드 게일어 "칼파"(calpa) 또는 "칼파크"(cailpeach)에서 파생된 것으로 생각된다.소위 "타락천사" 들은 세 부류로 나뉘게 되었는데, 한 부류는 땅에 사는 요정이 되었고, 두 번째 부류는 바다에 사는 블루맨이 되었고, 마지막 부류는 하늘에 살면서 북극광(오로라)을 일으킨다고 한다.[8] 블루맨들은 인간과 생김새와 몸집이 모두 같으나, 피부색이 푸르다는 것만 다르다.[9] 블루맨의 얼굴은 회색조를 띠고 하관이 길었으며,[9] 어떤 블루맨들은 팔이 길었는데 팔 역시 회색조를 띠었다. 그리고 그들은 푸른색 쓰개를 선호했다.[3] 최소 1개 이상의 문헌에서 그들이 날개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10] 시안트 제도에서 스카이 섬 북쪽까지 이르는 약 19 킬로미터 길이의 수역은 폭풍우가 심하며 사시사철 조수 변화도 매우 빠르다.[11] "파괴의 해류"(Current of Destruction)라 불리는 물살이 숱한 배들을 잡아먹은[12] 이 험한 바다의 해식동굴에 블루맨이 산다.민치 해협에서 다소 떨어져 있는 스코틀랜드 본토 서부의 코리브리컨 만에도 다른 종류의 스톰 켈피가 있다는 얘기가 있다. 시인이자 민속학자인 앨러스데어 앨핀 맥그레고르는 코리브리컨의 스톰 켈피가 "하이랜드의 폭풍 물귀신(스톰 켈피) 중 가장 사나운 것"이라고 했다.[13] 하지만 블루맨은 분명히 매우 좁은 지역에서만 국한되어 전승되고 있다. 도널드 알렉산더 맥켄지에 따르면, 블루맨과 유사한 요괴는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으며, 심지어 스코틀랜드 안에서도 민치 해협 일대를 벗어나면 관련된 전승이 존재하지 않는다. 요괴나 정령에 관한 전설이 이렇게 좁은 지역에만 국한되어 전승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14] 민속학자이자 티리 섬의 기독교 교역자였던 존 그레고르슨 캠벨에 따르면 스코틀랜드 본토 서해안에 해당하는 아가일 지방에는 블루맨 전승이 없다.[9] 그런데 1700년대 중반에 스코틀랜드 본토에서 북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셰틀랜드 제도의 쿼프 마을을 방문했던 존 브랜드가 주민들에게 블루맨과 유사한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15] 이 이야기에 따르면, 섬 주위의 바닷물 속에 수염이 난 늙은 남자의 형상을 한 존재가 있어서, 배를 따라다니며 물 바깥으로 튀어나와 배의 승객과 선원들을 공포에 질리게 했다고 한다.전통적인 블루맨 전승에 따르면 블루맨들은 격렬한 폭풍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으나, 날씨가 좋을 때는 잠을 자거나 해수면 바로 아래에 둥둥 떠다닌다.[3] 그들은 허리 위 몸통만 해수면 바깥에 내놓고 쇠돌고래가 하는 것처럼 몸을 비틀고 자맥질을 하면서 움직인다.[17] 날씨가 맑고 밤하늘이 밝은 날이면 신티 놀이를 하면서 논다.[18] 블루맨들은 언어 구사능력이 있으며, 뱃사람들과 대화할 수도 있다. 특히 선박을 물보라로 뒤덮어 버릴 때 신나서 떠들어 대는데, 배가 전복되는 순간 천둥처럼 웃어댄다.블루맨들이 떼로 모여서 지나가는 배를 공격할때면그들의두목(그이름소나그Seonaidh라고 하기도 한다)이[10] 물 밖으로 몸을 내밀고 배의 선장에게 두 문장 짜리 시를 외친다. 도널드 맥켄지가 인용한 블루맨과 인간 선장 사이의 시 대결의 예시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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